예술이란 단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의도와 철학이 깃든 창조적 행위다. 그렇다면 '의도' 없이 생성된 AI의 창작물은 과연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글은 '의도'의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과 AI 창작물 사이의 간극을 살펴보고, 향후 AI 예술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예술에서 '의도'란 무엇인가: 역사적 맥락과 철학적 기반
예술에서 ‘의도’란 단어는 단순히 “무엇을 하려는 생각”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 창작 행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인간이 예술작품을 창조할 때는 내면의 감정, 철학, 사회적 맥락, 혹은 정치적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담는다. 이런 의도가 있어야만 그 작품은 감동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예술로 간주된다. 미술사와 철학에서 ‘의도’는 예술을 정의하는 중요한 축 중 하나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mimesis)이라고 정의하며, 진리나 이상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즉, 예술은 어떤 이상을 반영하려는 ‘의도’를 갖는 행위라는 점에서 현재의 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더 발전된 시각으로, 예술이 감정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창작자의 의도가 단순히 외부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람자에게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감정적 전략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예술가의 개성이 강조되며 ‘작가 중심주의’가 떠올랐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은 단순한 묘사가 아닌, 철학과 신학, 과학에 대한 의도가 복합적으로 담긴 결과물이었다. 이는 창작자가 작품에 부여한 ‘의미’와 ‘의도’가 곧 예술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은 점점 더 개념적이 되었고, 작가의 의도가 작품 자체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관점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은 변기에 '작가의 서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미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작가가 이 변기를 예술로 의도했기 때문에 예술이다”라는 논리를 정당화했다.
이처럼 예술에서의 ‘의도’는 단지 창작 행위의 배경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정의하는 핵심적 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렇다면 이제 이 개념을 AI의 창작물에 적용해 볼 차례다.
2. AI에게 '의도'란 무엇인가: 존재하지 않는 주체의 창작
AI는 학습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을 통해 이미지를 생성하거나 음악, 시, 텍스트를 창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I는 '무엇을 위해,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즉, AI에게는 인간이 가진 주체적 경험이나 정서, 철학, 사회적 맥락에서의 문제의식이 없다. 그렇다면 AI가 생성한 결과물은 단순한 '산출물(output)'이지, 진정한 의미의 '작품(work)'이라고 할 수 있을까?
AI는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코드와 데이터의 조합이다. 그것은 환경을 인식하거나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다. 예술에서의 ‘의도’는 개인의 경험, 세계관, 감정, 사회적 상황 속에서 나오는 유기적인 통찰이다. 반면, AI는 주어진 조건과 통계적 패턴 속에서 최적의 결과를 계산하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미드저니나 스테이블 디퓨전 같은 생성형 AI는 입력된 프롬프트에 따라 이미지를 만든다. 이 프롬프트는 인간 사용자에 의해 입력된 것이며, AI는 단지 그 조건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미지를 분석해 유사한 스타일을 생성할 뿐이다. AI가 스스로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의미 부여'의 능력을 가졌다고 보기엔 어렵다.
물론 AI에게도 일종의 '준-의도(semi-intention)'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존재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AI가 특정 결과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알고리즘적 목적이 ‘의도’의 기초 형태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조차 AI가 본질적으로 자기 의식을 지닌 존재는 아니라는 점에서 제한적이다.
AI가 생성한 작품을 예술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결국 창작 주체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우리가 예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누가 만들었는가'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때 'AI가 만들었다'는 대답과 '표현하려 한 의도가 없다'는 사실은 예술의 본질적 조건과 충돌한다.
3. 인간-기계 협업의 진화: 의도와 의미의 공동 창출 가능성
그렇다면 AI는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는가? 이 질문은 점점 더 복잡한 층위를 가지게 된다. 단순히 인간의 명령에 따라 결과물을 산출하는 도구로서의 AI가 아니라, 인간과 협업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파트너로서의 AI 개념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예술가들은 AI를 창작 도구 이상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를 창작의 공동체로 수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작곡가가 AI와 함께 악보를 만들어 나가거나, 미술가가 AI가 만든 이미지 위에 자신의 감정을 덧입히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 경우, AI는 인간의 의도를 보완하거나 확장시키는 보조적 존재로서 작동하며, 전체적인 창작물의 '의도'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에서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협업 모델에서는 ‘의도’의 개념이 전통적인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의도성의 분산’ 혹은 ‘공동 창출적 의도’라는 새로운 정의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AI가 직접 감정을 가지지는 않지만, 인간이 부여한 프롬프트와 AI의 생성 결과 사이에 일종의 창의적 교류가 일어나면서, 창작자는 기존에 상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창작의 주체는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하게 되며, ‘의도’ 역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주체에게만 귀속되지 않는다.
예술계는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춰, 전시회나 수상 제도에서도 AI와 인간의 공동 창작물을 평가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의도가 창작자의 고유 속성이라는 기존 개념이 수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래에는 ‘AI가 만든 작품’이라기보다 ‘AI와 함께 만든 작품’이라는 식의 새로운 예술 언어가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결국, 협업의 진화는 ‘의도’라는 개념 자체의 확장을 요구한다. 인간과 기계가 서로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대등한 파트너로 인식하는 순간, 예술의 본질도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미래의 예술과 AI: 의도를 재정의하는 시대의 도래
AI가 창작에 관여하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우리는 예술의 본질적 기준을 재점검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의도’라는 요소가 더 이상 고정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분산되고 구성될 수 있는 개념임을 인정해야 할 시점이다.
앞으로의 예술은 단순히 결과물의 품질이나 완성도를 넘어,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 인간과 AI의 상호작용 방식, 그리고 그로 인해 촉발되는 새로운 질문들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도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대신 ‘누구와 함께 만들어졌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의미가 형성되었는가’, ‘그 결과물이 어떤 반응을 이끌어냈는가’와 같은 복합적인 물음이 예술 평가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또한, 교육과 비평의 영역에서도 변화가 요구된다. 예술 교육은 이제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단순히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 창작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예술 비평 역시 AI 창작물의 '의도 없음'을 문제 삼기보다, 그 결과물이 어떠한 사회적, 철학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술은 변화에 민감한 생명체다. 기술과 철학,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예술의 정의도, 본질도, 판단 기준도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의도’라는 고전적 개념이 다시 한 번 재해석되고 있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AI가 만든 예술이 과연 인간의 감성을 대체할 수 있을지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예술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질 가능성만은 분명하다. 미래의 예술은 더 이상 ‘누가 만들었는가’보다,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도가 재구성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