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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도 전기와 전화가 있었다? - 개화기 기술 도입 이야기

by 두둑이 2025. 5. 13.

    [ 목차 ]

19세기 말 조선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열강이 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가운데, 조선은 전통을 지키려는 세력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파 사이의 갈등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죠. 많은 분들이 조선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유교 중심의 전통 사회로만 존재했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 조선 말기에도 전기와 전화, 철도와 우편 등 다양한 근대 기술들이 하나둘씩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 말기, 즉 개화기 시절에 전기와 전화가 어떻게 도입되었고, 이 기술들이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생각보다 흥미롭고 뜻밖의 이야기들이 많으니,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 말기에도 전기와 전화가 있었다? - 개화기 기술 도입 이야기
조선 말기에도 전기와 전화가 있었다? - 개화기 기술 도입 이야기

 

경복궁에 불이 켜지다 -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전기


조선에서 전기가 처음 사용된 시기는 1887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고종 황제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근정전 앞에 전등을 설치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전기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인 기술자인 찰스 헤스(Charles H. Morse)를 초빙했고, 그 결과 궁궐 내부에 소규모 발전소가 설치되었지요. 이 발전소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전기 설비였으며,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전등이 켜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기 도입은 단지 새로운 기술의 수용을 넘어, 조선이 근대 문명과 접촉하며 변화의 의지를 보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일반 백성들이 전기를 사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전기는 왕실과 일부 상류층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전히 등잔불과 초를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점차 바뀌기 시작합니다. 1900년에는 서울에 민간 전기회사가 세워졌고, 시내 곳곳에 전등이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1905년부터는 한성전기회사가 전차 운행과 함께 본격적인 송전 사업에 나서게 됩니다. 이처럼 전기의 도입은 조선 도시 문화를 서서히 바꾸어 나갔고, 이는 결국 조선 사회의 생활 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조선에도 전화가 있었다 - 고종의 직접 통화 실험


조선에 전화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96년의 일이었습니다. 고종 황제께서는 당시 직접 전화기를 사용해 경복궁과 덕수궁 간 통화를 시연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설치된 전화는 왕실과 정부 부처 간의 통신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군사적 혹은 행정적인 용도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전화기의 존재조차 알기 어려운 시기였지만, 고종의 이 같은 시도는 조선이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화기의 도입 역시 미국과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통신망을 빠르게 장악하며 전화와 전보 기술을 식민 지배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부에서는 전보와 전화 통신망 확장을 통해 행정과 군사, 상업 분야에서 효율을 높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전보 통신망도 확장되어 주요 도시 간 소식이 하루 이틀 안에 전달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언론, 상업,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문의 발행 주기가 짧아지고, 상품의 주문과 유통 시스템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전화는 도시 경제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당시에는 전화기 한 대가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고, 전화선을 설치할 수 있는 가정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먼 기술이었습니다.

 

전기와 전화가 가져온 도시의 변화 - 근대화의 신호탄


전기와 전화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조선 사회의 구조와 도시의 모습까지도 변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먼저 전기의 도입은 야간 활동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시장이나 상점의 운영 시간이 늘어나고, 야간 교육기관이나 공공 모임 등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죠. 전기가 설치된 거리는 밤에도 환하게 밝아졌고, 이는 도시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전화 또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정부기관 간의 신속한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행정의 효율성이 높아졌고, 군사 작전에서도 전화는 빠른 지휘와 명령 전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상업 분야에서는 전화로 주문이나 협상이 가능해지면서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확장되었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경제 구조가 형성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를 키우는 결과도 낳게 됩니다. 전기와 전화는 주로 서울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의 생활이 유지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정보, 교육,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격차가 점점 벌어지게 되었죠. 이는 이후 조선 사회가 안고 가야 할 중요한 구조적 문제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기술은 곧 국력이다 - 근대화 시도와 그 역사적 의미


조선 말기의 전기와 전화 도입은 단순히 신기한 기술을 받아들인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종과 개화파는 조선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다양한 개혁과 기술 수용을 시도하였습니다. 전기와 전화뿐 아니라 철도, 우편, 근대적 학교 제도, 신문 등도 이 시기에 함께 도입되었으며, 이는 조선이 국제 사회의 변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던 흔적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내부의 정치 혼란, 보수 세력의 반발 등으로 인해 완전히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조선의 근대화는 중단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의 이러한 근대화 시도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정보화를 빠르게 추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기술과 문물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이 시기의 사례들은, 오늘날 우리가 기술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전기와 전화, 그리고 스마트폰까지도 모두 그 뿌리를 따지고 올라가 보면, 바로 조선 말기 고종 시대의 과감한 선택과 실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단절되는 법이 없습니다. 한 번 켜진 불빛, 한 번 연결된 전화선은 결국 오늘날 우리의 삶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