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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 지금의 서울은 모순과 변화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적 억압 속에서도 경성에는 서구 문물과 근대적 도시 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며 새로운 소비문화와 생활양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기 일본 제국은 식민지를 ‘문명화’한다는 명분 아래 경성을 서구식 도시로 탈바꿈시켰고, 덕분에 극장, 백화점, 경성전차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도시 시설과 대중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 중심에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이라는 새로운 인물상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서구식 복장을 하고 커피와 재즈를 즐기며, 극장과 백화점을 드나드는 이른바 도시의 신세대였습니다. 당시 많은 조선 청년들이 이들의 모습에 열광했고, 일부는 비판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과연 이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이들이 살아간 경성의 도시는 어떤 공간이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1930년대 경성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당시의 도시 문화와 모던보이·모던걸의 등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 그들은 누구였을까?
모던보이와 모던걸(줄여서 모보·모걸)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경성의 도시문화를 상징하는 인물군입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과는 다른 서구식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문화와 취향을 소비하는 계층이었습니다. 외모나 행동, 가치관에서 확연히 기존 세대와 차별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모던보이는 깔끔한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담배를 손에 든 채 다방이나 극장을 드나들며, 유창한 일본어나 영어를 구사하던 도시의 세련된 남성을 뜻합니다. 흔히 문학, 예술, 언론, 법률 등 지식 기반 직업군에서 활동하거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신지식인들이 모던보이의 전형적인 이미지였습니다.
반면 모던걸은 단발머리에 서양식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으며, 자유연애와 자아실현을 중시하던 신여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종로, 명동, 충무로 일대의 다방과 백화점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카페에서 음악을 듣거나 친구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단순한 복장 변화가 아니라, 식민지 사회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 개인의 욕망과 자율성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전통을 버린 타락한 세대"라는 비판도 받았고, 대중문화의 중심에 있었지만 언제나 논쟁적 존재였습니다.
근대 도시 경성의 변화, 공간이 바꾼 일상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등장은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30년대 경성은 인구 3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며, 철도와 전차망, 근대식 도로와 교통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도시화는 단순한 생활의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 구조와 문화 소비 패턴을 바꾸는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공간은 ‘경성역’과 ‘본정통’(지금의 명동), ‘남대문시장’, ‘종로거리’ 등이었습니다. 이곳들은 도시의 핵심 상업지역으로서 백화점, 영화관, 다방, 양식당, 서점 등이 밀집해 있었고, 당시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과 모던 문화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이 공간을 드나들며 경성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또한 백화점의 등장도 주목할 만합니다. 1930년대 경성에는 미쓰코시 백화점(현재 신세계 본점의 전신)과 같은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서며, 상품 구매와 문화 체험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소비공간이 탄생했습니다. 백화점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피아노 연주회를 듣는 것도 모던한 일상이었고, 이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했습니다.
이 밖에도 ‘카페’와 ‘다방’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커피와 음료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재즈 음악을 감상하며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은 이전 세대에게는 낯설고 도전적인 문화였지만, 이들에게는 문화적 개방성과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모던의 이면, 식민지 현실과의 충돌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자유롭고 세련된 인물로 묘사되지만, 그들의 존재는 식민지 현실 속에서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뚜렷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경성의 근대화 역시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고, 일본인의 생활 편의를 위한 것이었기에, 조선인들은 이 변화의 수혜자라기보다는 주변인일 때가 많았습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 역시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근대문물을 누리고 새로운 문화에 열광했지만, 동시에 일본식 교육과 억압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주의와 감각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 청년으로서 느끼는 좌절과 무력감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지식인 모던보이 중 일부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 민족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고민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광수, 염상섭,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은 모던 경성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식민지 청년의 불안과 고뇌를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그들의 문학은 단순한 도시 찬양이 아니라, 식민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개인의 자화상이었던 것이지요.
또한 모던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는 종종 모던걸을 ‘퇴폐적’이며 ‘전통을 저버린 신여성’으로 묘사하며 경계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자유연애와 자기 표현을 시도했던 여성들에게는 당시 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모던걸은 종종 ‘이상한 여자’ 또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도시문화의 유산, 오늘날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들
모던보이와 모던걸, 그리고 1930년대 경성의 도시문화는 단순히 과거의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근대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억압과 해방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탐색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근대 한국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가치와 갈등 속에서 지금의 문화가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경성의 모던 문화를 복원하고 재해석하며, 당시 공간과 삶을 조명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영화, 전시, 복고 패션 등을 통해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단순한 복고가 아닌 ‘문화적 성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과거를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지금과 연결된 고민과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도시문화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도시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와 억압, 소비와 저항,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다양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성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단지 멋있고 세련된 옛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식민지라는 비극의 시대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려 했던 용기 있는 개인들이었고, 그들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 삶의 어딘가에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