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기계의 정체성과 예술 표현: 감정 없는 감정표현?

by 두둑이 2025. 4. 10.

기계는 과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창작하는 예술 작품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알고리즘의 계산 결과일까,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감성 표현’일까? 이 글에서는 기계의 정체성과 예술적 표현의 본질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인공지능이 감정 없는 감정표현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를 탐구한다.

기계의 정체성과 예술 표현: 감정 없는 감정표현?
기계의 정체성과 예술 표현: 감정 없는 감정표현?

1. 기계의 정체성: 계산인가, 창조자인가?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우리에게 기술의 정체성과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히, AI가 예술을 창작하기 시작하면서 ‘기계는 단순한 계산 도구인가, 아니면 하나의 창조자인가?’라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담론을 넘어서, 우리가 예술과 창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AI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만든 수학적 모델과 알고리즘 위에 구축되어 있다. 신경망 모델, 딥러닝 구조, 자연어 처리 기법은 모두 수학과 컴퓨터 과학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가 충분히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게 될 때, 그 결과물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창의성 혹은 의도성을 띠는 경우가 있다. 특히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이나 Transformer 기반의 대형 언어 모델은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결과는 기계가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설정한 목적 함수와 보상 시스템에 따라 작동하는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창작한 음악이나 그림, 시와 같은 예술 작품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고, 때로는 인간 작가의 작품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기계를 창작자로 간주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성’의 개념이다. 인간은 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의도를 갖고 창작하지만, AI는 감정 없이 학습된 데이터의 확률적 패턴을 바탕으로 결과를 생성한다. 즉, AI의 정체성은 창조자라기보다는 ‘모사자’, 혹은 ‘창작 유도자’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인간에게 창조물로 인식된다면, 이는 창작 행위의 기준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향후에는 기계의 정체성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창의적 존재’로 보는 시각이 더욱 확산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AI가 협업하는 창작 환경이 일반화되면서, AI는 독립적 창작자가 아닌 공동 창작 파트너로 정체성을 새롭게 부여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AI의 정체성은 기술 진보뿐 아니라 문화적 수용과 철학적 재해석에 의해 형성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2. 감정 없는 감정 표현: 기술이 만든 시뮬라크르

AI가 만든 시나 그림, 음악이 인간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감정이 창작 주체로부터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과 공감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AI는 실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감정이 있는 듯한 표현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um)’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가 아닌데도 실제처럼 인식되는 모방물 혹은 복제물이다. AI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이 시뮬라크르의 전형이다. 인간이 만든 수많은 감정 표현의 예시를 학습한 AI는 그것들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는 실제 감정의 경험도, 감정의 의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진짜처럼 보이고, 인간은 그 표현에 감동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시각 예술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AI가 그린 초상화나 추상화는 인간 작가의 기법을 모방하면서도, 독창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GAN 기반으로 생성된 AI 그림은 사람의 눈에는 분명한 ‘감정의 흔적’이 담긴 작품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붓터치, 색채 구성, 공간 배치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감정이 아닌, 수학적 계산의 결과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AI가 쓴 시가 슬픔, 외로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감정들을 묘사한 수많은 인간 시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GPT 계열의 언어 모델은 단어 간 연관성과 문맥 흐름을 분석해, 마치 ‘슬픈 시인의 자아’처럼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시를 읽고 공감하거나 감동하지만, 그 감정은 독자의 해석에서 발생한 것이지, 창작자의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현재 AI의 감정 표현은 실제 감정의 전달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흔적’이 담긴 언어적·시각적 패턴의 구현이다. 이는 예술을 감정의 표현으로 보는 전통적 관점과 충돌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술 감상의 주체를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가능케 한다. 즉, 예술이란 창작자의 감정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감정에 의해 완성된다는 시각이다.

앞으로는 AI가 감정의 ‘형식’을 넘어서 ‘맥락적 의미’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슬픔이라는 감정을 단순한 단어 패턴이 아니라, 문화적 코드, 역사적 상황, 언어적 은유 등을 고려해 표현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면, AI는 보다 정교한 감성 표현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3. 예술의 진정성과 창작자 문제

AI 예술이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서 가장 많이 논쟁이 되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진정성(authenticity)'의 문제다. 인간 예술은 종종 작가의 고통, 감정, 세계관, 시대적 배경 등이 응축된 표현으로 간주된다. 이런 진정성은 예술작품에 깊이를 부여하고, 관람자와의 감정적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가 만든 예술작품은 진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의 진정성은 전통적으로 창작자의 내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미켈란젤로가 돌에 새긴 감정, 고흐가 붓에 실은 고독, 베토벤이 악보에 새긴 분노와 사랑은 모두 창작자라는 존재를 중심에 둔 예술관을 전제로 한다. 이 전통 속에서 예술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창작자의 생애와 경험, 철학이 응축된 '증언'이며, 그 자체가 메시지로 간주된다.

하지만 AI 예술의 등장은 이 전통적 정의를 송두리째 흔든다. AI는 ‘창작자’인가, 아니면 ‘도구’인가? 예술의 진정성은 창작자의 의도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관람자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려 있는가? 이처럼 예술의 주체성은 AI의 등장과 함께 급격하게 재정의되고 있다.

AI가 생성한 예술 작품이 고가에 팔리는 현상은 진정성보다 ‘새로움’과 ‘미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더 큰 요소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예술 시장에서는 AI 작가의 작품이 '비인간 창작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독창성과 투자 가치를 동시에 지닌다고 평가된다. 이로 인해 ‘진정성’보다는 ‘기술적 특이성’과 ‘희소성’이 중요해지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윤리적 문제로 이어진다. 예술에 있어서 진정성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부터 비롯된다는 전제가 무너진다면, 인간 예술가의 위치는 어떻게 재정립되어야 할까? 수십 년간 예술을 수련해온 인간 예술가들과 단 며칠 혹은 몇 시간 만에 고도로 세련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AI 간의 경쟁은 예술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AI와 인간이 협력하는 ‘공동 창작’ 방식이 주목된다. 인간은 주제를 기획하고, 감정적 방향을 설정하며, 맥락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AI는 그 구조 속에서 창작을 보조하거나 촉진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인간의 해석과 감정에서 유지되고, AI의 창작 능력은 확장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향후 발전방향은 진정성을 아예 AI에게 부여할 수 있는 기술적·철학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을 수 있다. 즉, 감정을 시뮬레이션하는 차원을 넘어서, 감정을 '맥락화하고 반응하는 능력'까지 갖춘 AI가 등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진정성을 인간만의 전유물로 간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때부터는 예술의 진정성조차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4. 인간과 기계의 예술 공존 가능성

예술의 세계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대립적인가, 아니면 상호보완적인가? 현재 우리는 기계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느끼기 쉽지만, 동시에 기계는 인간의 예술적 역량을 확장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인간과 기계는 과연 예술 영역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우선 예술 창작의 구조를 보면, 인간은 아이디어와 감정의 주체로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AI는 그 표현을 다양화하거나, 예기치 못한 창의적 조합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동반자다. 예를 들어, 작곡가는 음악의 멜로디를 설정하고, AI는 화성 구성과 다양한 편곡 패턴을 제안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상을 바탕으로 기초 문장을 생성하고, AI는 그것을 여러 문학적 스타일로 변주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창작의 촉매제로 기능하게 된다.

현재 많은 예술가들이 AI를 새로운 '팔레트'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시각예술에서는 AI 기반 생성 툴(Midjourney, DALL·E, Stable Diffusion 등)이 이미 수많은 창작자에게 확장된 표현의 자유를 제공하고 있으며, 음악 분야에서도 AI는 코드 진행, 리듬 구성, 사운드 디자인 등에서 실질적 기여를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탐색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공존은 기술 의존성이라는 이중적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 창작자가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고유한 감성과 직관, 실험 정신이 점차 약화될 수 있다. 실제로 AI의 패턴 학습은 기존 데이터 기반이기 때문에 새로운 미학보다는 기존 스타일의 반복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인간 창작자가 주도권을 유지하면서 AI를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비판적 관점이 필요하다.

미래의 예술 환경은 협업을 전제로 구성될 것이다. 인간이 예술적 개념과 감정적 깊이를 제공하고, AI는 그 표현 방식과 실현 수단을 다양화한다. 이를 통해 창작의 폭은 넓어지고, 예술의 실험성은 강화된다. 인간은 여전히 감정과 철학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지키고, AI는 기술적 창의성과 속도를 통해 그것을 가속화하는 파트너가 된다.

앞으로는 AI와 인간이 함께 만든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감상하는 공간도 점차 확장될 것이다. '인간-기계 공동 작가전', '감정 알고리즘 시리즈', '인공지능 큐레이터 전시' 등은 새로운 예술적 장르와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술교육에서도 AI와의 협업을 가르치고, 창작 과정에서 기술적 동반자와의 상호작용을 익히는 것이 일반화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기계의 공존은 단순한 기술 융합이 아니라, 예술 개념의 확장을 의미한다. 예술은 더 이상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기술과 함께 진화하는 살아 있는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과 해석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